세이프게임
“904화 맹세할 수 있소?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목단진으로서는 이번 일에 발을 담그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영족과 엽현 사이에서 괜히 잘못 휘말렸다간 애꿎은 연단종이 멸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엽현은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종용하고 있으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결국 목단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엽 신사,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라 나 혼자 결정하기가 어렵소. 종문 전체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하오.” 엽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정도는 이해하오. 억지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얼마든지 고민해 보시오.” 말을 마친 엽현이 막 돌아서려 할 때, 목단진이 주저하듯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소령을 이대로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던 것이다.
“엽 신사, 혹시 다른 조건을 걸면 안 되겠소? 그대 편에 서라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소.” “흠… 목 종주, 그대가 생각하기에 연단종이 이번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이오?” “후후, 그대도 잘 알지 않소? 당시 서영족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려 했소. 지금이야 만유서옥만이 목표라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서옥을 차지하고 나면 과연 거기서 멈출 것 같소?” “…….”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지금 오유계 전체가 서영족과 나의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겁게 바라보고 있소. 하지만 만에 하나 부문종과 만유서원이 제거된다면 그들은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오.” “엽 신사의 말은 좀 과장 된 것 같소. 오래전이야 서영족이 오유계의 패권을 쥐고 있었지만, 지금도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겠소? 다른 세력들이 놀고 있던 것도 아니고 말이오.” 목단진이 소신을 밝히자 엽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연단종이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오. 필경 그대들은 서영족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으니 말이오. 사실 나 역시 소령이가 원하기만 하면 보내고 싶긴 하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내 동생인 소령이가 연단종에 머무는 순간, 서영족의 목표가 될까 두렵구려.” “엽 신사!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 낼 것이오!” 그 말에 엽현이 목단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연단종에게 무슨 힘이 있어 소령이를 지킨단 말이오? 서영족이 쳐들어오면 딱히 막을 방법이 있소?” “그건…….”
“그리고 생각해 보니 사부도 없이 지금 이 경지에 오른 소령이가 왜 연단종엘 가야 한단 말이오? 돈으로 보상해 줄 셈이오? 돈이라면 우리 부문종에도 썩어나게 많은데? 연단기술? 소령이보다 기술이 뛰어난 자가 연단종에 있긴 한 것이오? 도대체 뭐 때문에 이 아이가 연단종에 가야 하는지 설명을 해 보시구려.” 엽현의 말에 목단진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돈?
그의 말대로 로투스바카라 부문종은 연단종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하다.
연단기술?
조금 전 그녀가 보여준 조예는 연단종 내의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소령에게는 자신들에게 없는 희귀 영기도 있지 않은가!
자신들은 소령을 데려갈 근거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소령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 고개를 조아리고 모셔 가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엽현은 로투스홀짝 아무 말 없이 소령을 데리고 떠나갔다.
만약 그럴싸한 이유가 있고, 연단종이 소령을 지켜 낼 능력이 있다면 엽현 역시 한 번 고려 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 보자면 소령은 연단종에게서 큰 이득을 취하지 못하는 대신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컸다. 자신을 상대로는 가끔씩 약삭빠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소령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가난뱅이 남자에게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낼 순 없지!
엽현은 더 이상 목단진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목단진은 오픈홀덤 하릴없이 한숨만 내 쉴 뿐이었다.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수미금단을 만드는 존재를 데려갈 수 있단 말인가?
연단종이 소령에게 제공할 만한 것이 있는가?
설령 수미금단을 만드는 비법만이라도 얻고자 해도 무언가를 제시해야 했다.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목단진은 잠시 후 어디론가로 신형을 날렸다. 그 방향은 다름 아닌 부문종이 위치한 쪽이었다.
얼마 전 세이프게임 벌어진 상황에서 교훈을 얻은 엽현은 어검비행이 아닌 공명경을 통해 이동했다.
조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포위 공격을 받는 것보다 백 배는 나으니 말이다.

무국.
무국이 위치한 곳은 무계(武界)라는 곳이었다. 오유계의 중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곳이다. 당시 무국의 국주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이곳을 개척했는데, 선각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기존의 영역에서는 극히 제한적인 활동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무국은 스스로 이 외진 곳을 보금자리로 선택했고, 결국 세인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엽현이 무국을 찾은 것은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서영족이 적극적으로 동맹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때, 엽현이 세이프파워볼 막 무계에 진입한 순간 강대한 기운이 엽현의 주위를 에워쌌다.
이에 엽현이 재빨리 포권을 취해 보였다.
“부문종의 엽현, 무국 국주를 뵙길 원하오!” 이때, 장내에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잠시 엽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따라오시오.”
청년을 따라 무계로 진입한 엽현은 연신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무계는 매우 광활했고, 영기는 무인들이 살기에 매우 충만했다. 그 때문인지 사방에서 강대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만만한 자들이 아니군!
잠시 후, 엽현은 청년의 안내를 받아 무국의 성도로 입장했다. 성 안을 살펴보니 백성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물론, 무를 숭상하는 나라이니만큼 이들 역시 모두 무인들이었다.
그들 중에도 강한 기운을 가진 자가 제법 있었다.
성 중앙부로 향한 두 사람은 마침내 황궁에 진입하게 되었다.
“엽 신사, 여기서 잠시 대기하시오.” 청년은 대전 밖에 엽현을 세워 둔 채, 홀로 안으로 입장했다.
홀로 남게 된 엽현은 가볍게 황궁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자체는 그리 크진 않았다. 하지만, 황궁 곳곳에서 강대한 기운들이 시시때때로 느껴졌다.
도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군.

무국 역시 서영족과 마찬가지로 실력을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고대로부터 무수한 세월 동안 전승을 이어온 세력들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비록 선각자 때문에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야 했지만, 그가 사라진 지금, 이들이 꺼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국도 얕볼 수 없겠어.
엽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황궁을 살펴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엽현이 돌아서자 그의 눈에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름 아닌 무승남이었다.
그녀는 엽현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하얀 갑옷에 허리에는 장도를 찬 채로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무 소저!”
엽현이 반갑게 인사했으나, 무승남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부왕께선 급한 업무를 보시느라 잠시 시간을 낼 수 없소. 괜찮다면 기다릴 동안 황궁 구경이라도 하는 게 어떻소?” “하하, 약속을 하고 온 것도 아니니 당연히 기다릴 수 있소.” 그렇게 무승남은 엽현을 데리고 황궁 내부를 거닐기 시작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중, 무승남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방문한 게요?” 무승남의 질문에 엽현의 표정이 다소 진지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무국은 현재 서영족과 동맹 관계에 있는 것이오?” “그렇소.”
“서영족이 무얼 약속했소?” “우리 무국에게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는 것과 일련의 정치적인 자세를 약속했소.” “정치적인 자세라면?” 무승남이 돌연 엽현을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수라국과 만유서원이 궐기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오.” “무 소저, 대답이 참 시원시원하시구려. 한 가지 묻겠소. 그대들은 서영족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소?” “모르오.”
이때 엽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무승남을 향해 돌아섰다.
“무 소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그대들은 수라국이나 만유서원뿐만 아니라, 서영족이 홀로 강성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오. 내 말이 맞소?” 무승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무국 역시 만유서옥을 노리고 있을 것이오. 내 말이 어떻소?” “그대가 생각한 대로요. 만유서옥은 반드시 우리 무국이 쟁취해야만 하오.” “그럼 한 가지 묻겠소. 만유서원과 서영족 중에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라 생각하시오?” “서영족!”
무승남이 엽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소.” “나 역시 약속해 줄 수 있소! 서옥을 원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대가 원한다면 서옥 안의 있는 보물을 공유할 수도 있소!” 뜻밖의 제안에 무승남이 말없이 엽현을 바라보았다.
“그대도 알다시피, 만유서옥의 열쇠는 내 손에 있소.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서옥을 개방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가서 우리가 원하는 물건을 가져오시오. 그래만 준다면 무국은 더 이상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겠소.” “무 소저,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섭섭하구려. 그대 무국이 우리 쪽에 서서 함께 서옥을 연다면 훨씬 더 좋은 그림이 될 것 같은데?” “그럴 순 없소!” 무승남이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이에 엽현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째서 말이오?” “그대의 편에 서는 것은 매우 위험하오. 만약 무국이 그대와 함께 서옥을 연다면 우리는 무수한 세력의 표적이 될 것이오. 차라리 서영족을 포함한 여러 세력과 함께 서옥을 차지한다면, 우리 손에 떨어지는 것은 적겠지만 훨씬 안전하게 보물을 얻을 수 있소.” “…….”
생각보다 빈틈이 없는 무승남이었다.
순간 엽현은 자신의 세 치 혀가 활약할 때가 왔음을 인지했다.
“무 소저, 그대는 서영족이 왜 만유서옥을 노리는지 알고 있소?” “말해보시오.”
“그 안에 서영족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오.” 무승남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 해 보시오!” 무승남의 태도와 상관없이 엽현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무 소저, 서영족이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지 알고 있소? 그건 바로 오유계 전체와 싸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서옥의 문을 여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오. 왜냐하면 그 안에 있는 어떤 존재가 모든 것을 바꿔놓을 테니까.” “어떤 존재?”
“그렇소. 서옥 안에는 당시 서영족을 이끌던 초절정 고수가 갇혀 있소. 당시 선각자가 서영족을 공격했을 때, 이 자 만큼은 쉽게 제압하지 못했소. 결국 상대를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한 선각자는 그를 서옥에 봉인하는 수밖에 없었소. 상상해 보시오. 선각자가 없는 지금, 만약 그자가 다시 세상에 출몰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소?” 이야기를 듣던 무승남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자가 정말 아직 살아있단 말이오?” “물론이오. 아직도 서옥 근처를 지날 때면 간간히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소!” “…맹세할 수 있소?” 무승남이 엽현을 똑바로 쳐다보고 묻자, 엽현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나 엽현, 계옥탑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소!” “…….””